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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어가는 열두가지 방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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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일발 작성일12-03-13 07:33 조회5,2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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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어가는 열두가지 방편


불초 지일무거가 30 여년동안 이른 아침 구덕산 산행길에서 물 소리 바람 소리에 마음을 맡기고 꽃 내음과 새 소리에 취하여 삶의 기쁨이 뭉개구름처럼 피어오르던 상념의 편린들을
긁어모아 보았습니다.
마음공부를 시작하시려는 님들께선 한 번 읽어보시면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하여 감히 여기 올려 봅니다. 님께서 날마다 좋은날 되시고 성불 하소서!!!!
나 안에 있는 나를 찾는 마음을 열어가는 열 두가지 방편

첫째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즉금(卽今)의 삶을 아끼고 즐기면서 기쁨도 슬픔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일이 기도의 첫 걸음이며 감사한 마음을 싹트게 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이른 아침의 산책이나 규칙적인 운동과 긍정적인 사고로 나무랄 데 없는 건강이 넘쳐야 합니다. 기(氣)가 쇠잔(衰殘)하여 내 몸 하나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데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어떻게 마음이 머물 것이며 신바람나는 춤과 노래가 무슨 소용에 닿겠습니까!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여 삶이 즐겁지 않으면 마음이 열리지 않고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올바른 기도를 이끌어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열려 있는 기쁜 마음이라야 모두 다 받아들이고 다 놓아 버리면서 텅 빈 허공으로 내 안에 있는 참나(眞我)를 찾는 귀한 인연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가정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에 마음이 머물면 봄을 만난 씨앗이 스스로 새싹이 돋아나듯이 지혜의 눈을 뜨게 된다고 합니다. 자유 평등 평화가 어우러진 사랑이야말로 진리의 본질이며 인간이 간직할 가장 소중한 보물인 것입니다.

둘째 하늘을 받들고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생명의 근원인 빛과 바람과 흙과 물이 인연을 만나 풀과 나무와 들짐승과 사람들이 강열한 태양과 찬란한 별들로 수놓은 밤하늘과 땅의 품에 안겼으니 우리는 모름지기 하늘과 땅을 받들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늘과 땅을 의지해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해주신 부모님 이야말로 하나로 거룩하신 님과 함께 가장 소중한 보뱁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잘 모시는 일이 기도의 시작이요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됩니다. 내 부모님을 정성껏 모시지 못하면서 현묘(玄妙)한 하나님이나 부처님을 뵙는 일은 교회에도 절에도 없습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그 부모님의 아득한 조상님을 섬기는 일이 마음 공부의 시작입니다.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원동태허(圓同太虛)한 아득한 조상의 성품이 천지 만물의 품성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 일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여여한 자성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하라고 가르쳤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데 어찌하여 너희들은 하나님을 보이라고 하느냐며 제자들을 꾸짖고 하나로 거룩한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만물을 내보내고 거둬들이는 창조주가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원동태허하게 자재하는 거룩한 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나 부처님이라는 이름에 매이고 지식이라는 차별지에 매이면 진리를 보는 안목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서양의 철학자 스펜서는 천지창조의 시작을 원점(Primary Point)이라고 했습니다. 이 원점이 진여요 본래자리요 무심이요 성령이요 불성인 것입니다. 이를 알면 내 안에 본래부터 하나로 온전한 하나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인 마음이요 불성이요 성령이란 비밀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고 했습니다. 깨닫고 나면 오늘 보는 산이 어제 보던 산과 다르지만 다른 가운데 같고 같은 가운데 다르다고 합니다. 만물불이(萬物不二)의 진리에 눈을 뜨면 중도(中道)를 깨달아 밝고 큰 법을 스스로 간직한다고 했습니다.

셋째 매사에 감사하고 자족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대자연과 더불어 나의 삶을 허락 해주신 창조주(因緣)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텅 빈 충만으로 즉금(卽今)의 삶을 즐길 줄 알아야 마음이 열립니다. 동녘 하늘이 붉게 물들어 힘찬 새벽이 열리고 상큼한 새벽 공기가 가슴을 찔러 올 때 오늘도 내가 자연과 더불어 목숨이 붙어있다는데 감사해야 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비바람이 불고 산과 들에는 들짐승과 풀과 나무들이 평화스럽게 어울리고 골짝을 흘러내리는 생명수가 대지를 적셔 온갖 씨앗을 싹트게 하는 거룩한 님의 큰사랑을 경배해야 합니다. 산들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밤낮이 의좋게 오가면서 만물을 내보내고 거둬들이는 일은 우리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날마다 할 일이 있고, 밥 먹고 잠자면서 정다운 이웃과 함께 살아간다는 일상적인 일이 대도의 단초(單初)이고 본질입니다. 새벽 하늘을 우러러 반짝이는 별빛에 나의 영혼이 빨려들고 하늘과 내가 하나가 되는 현묘(玄妙)한 절정에서 황홀경( 惚境)을 맛보아야 마음이 열리게 됩니다. 새벽 산책길에서 하늘의 기(氣)를 손끝에 느끼고 대지의 숨소리에 귀를 열어 바람 소리 물소리에 마음의 가벼운 떨림을 느낄 때면 거룩한 님의 손길이 내게도 와 닿는 신비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정교하게 돌아가는 자연의 섭리에 넋을 잃고 욕심 없는 하늘에 나를 맡길 때, 무심인 허공으로 신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열어 가는 안목이 열립니다. 생각이 머무는 곳에 신이 있기에 염재신재(念在神在)라 했습니다. 믿어야 보고, 보아야 열립니다.

넷째 학문의 기초를 확립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가 되어야 합니다.
밝은 눈과 귀를 가지면 졸업장이나 학위가 없어도 자연의 이치를 헤아려 큰 지혜에 이를 수 있지만 체계적인 공부는 마음을 열어 가는 길을 빠르고 쉽도록 이끌어 줍니다. 천문 역사 지리 물리 화학 역학 생물 지학 토목 전기 전자 유전공학 철학 문학 예술등의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오행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의 이치를 깨달아 우주 생성과 소멸의 기본 법칙을 이해하면 격물치지가 빨라집니다. 만법의 기초적인 원리를 알아야 공부에서 막히고 답답한 의문 덩어리를 풀어 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돌덩어리나 쇳덩어리가 죽었다지만 실은 수많은 양자 전자들이 원자 핵 주위를 너무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으니 이를 누가 죽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불활성 우라늄 238을 건드려 보세요 단박에 금강석도 녹일 열기와 폭풍과 방사선으로 엄청난 생물이나 무생물을 박살 낼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너무 작아도 보지 못하고 너무 커도 보지 못합니다. 우리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산소와 수소가 인연을 만나면 물이 되고, 물은 또 다른 인연을 만나 수많은 생명체를 만든다는 것은 상식이지 않습니까. 이처럼 유기물이나 무기물의 끝없는 이합집산(離合集散)과 보이지 않는 님의 힘(氣)을 빌어 시방세계를 장엄케 하는 일이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고 합니다. 유무나 생사의 경계를 우리의 안목으로는 알 수 없어도 자연을 자연이게 하는 도덕(道德)을 헤아리는 안목을 갖추기만 하면 큰사랑을 깨달아 하잘 것 없는 풀 한 포기라도 그 생명을 함부로 할 수 없는 큰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위무불위(爲無不爲)의 오묘한 법을 알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 감사한 마음이 우주를 덮고도 남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 명상을 통하여 지식을 버리고 지혜의 등불을 밝혀야 합니다.
입차문내면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라 했습니다. 참선에서 지식인 차별지(差別知)는 실상무상(實相無相)의 참 진리를 보는 눈을 멀게 하므로 모든 지식덩어리를 아낌없이 버리라고 일렀습니다. 지혜의 등불을 밝히지 않고서는 기도나 염불만으로는 거룩한 님을 바르게 모실 수 없는 일 입니다. 구경(究竟)에 이르지 않고서는 진리를 혜성처럼 지나칠 뿐 진리와 하나가 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만물불이(萬物不二)의 진리를 헤아릴 수 없고 성품(性品)을 보거나 성령(性靈)을 받는 일은 영원한 평행선입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본래자리인 원점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아 그 현묘(玄妙)한 이치를 언설로 당할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나를 찾는 지혜명상 없이 예배나 염불을 통해서만 결코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자유가 바로 깨달음인 해탈인 것입니다. 이 진리는 참 사랑이고 참 사랑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데서 시작하여 우주적인 큰사랑으로 발전합니다. 안으로 닫혀 있는 진리의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내 안에 있는 주인인 내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섯째 내스스로 남보다 가장 낮은 곳에 머물러 보아야 합니다.
가장 낮은 곳보다 더 내려갈 곳은 없기 때문에 마음이 한결 가볍고 편안해 집니다. 자신의 마음가짐에서 대통령은 말단 공무원으로, 사장은 신입 사원으로, 남편은 아내의 자리에서, 왕자가 거지로 뒤바뀐 생각으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값진 경험을 쌓아야 자신의 마음 그릇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공부가 됩니다. 갖가지 경험들이 교법(敎法)의 가르침이나 설교보다도 더 큰 공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지옥에 떨어질 경험마저도 법을 깨닫는데는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법을 깨뜨려서 법의 소중함을 알고, 질서가 무너졌을 때 무질서의 비능률과 고통을 알고, 배가 고플 때 쌀 한 톨의 소중함을 알게되는 이치와 같다고 합니다. 실패나 좌절로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고뇌 해본 사람이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았을 때 그 마음 열림은 한결 쉬워 진다고 했습니다.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여 순리대로 오르고 올라 더 올라갈 곳 없는 정점에서 한 걸음 더 내딛고 천길 만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즉금(卽今)의 나는 죽고 위로부터 새로운 나로 태어날 때 성품을 보고 성령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를 일러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 한다고 했습니다. 지혜명상과 지행일체로 끊임없는 마음 공부와 정성 된 기도에 매달리면 누구든지 백척간두에서 진일보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일곱째 고정관념을 깨뜨려 사고의 혁명을 이룩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180도 역전 시켜 고정관념을 박살내어 일등이 꼴지가 되고 꼴지가 일등이 되는 줄(序列)을 세워야 합니다. 이승 저승으로 편을 가르고 유무 생사와 대소 고저로 대립 시키면 불생불멸의 영생을 얻는 길은 이승과 저승 그 어느 곳에도 없다고 했습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했는데 남을 모르고 어찌 남에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남을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고, 내 것이 아니면 그 근처에 기웃거리지도 말라는 교법 만큼 편협한 가르침 또한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 쿠란도 읽어보고 금강경을 읽어본 사람이 신약성서와 구약성서도 읽어보고 탈무드를 읽어본 사람이 바가밧긷따도 읽어보고 니체나 소크라테스를 읽어본 사람이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란 도의 품에도 안겨보고, 차타레이 부인을 읽어본 사람이 춘향전도 읽어보고, 칸트를 읽어본 사람이 오쇼라즈니쉬도 읽어보고, 동양을 읽어 본 사람이 서양을 읽어보고, 비뚤어지고 못 생긴 쓸모 없는 것의 쓸모(無用之用)도 알아야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어리석음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전후 좌우를 동서를 가리지 않고 모두를 알려고 하는 것이 범신적인 종교라고 치부하는 사람 이야말로 마음 공부의 기틀도 마련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건축기사 자격도 없는 사람이 기초공사도 아니하고 모래 위에 마천루를 짓겠다고 만용을 부리는 어리석음과 다를 바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도 모르고 남도 모르면서 텅 빈 허공을 어떻게 알 것이며 중도(中道)에 들지도 않고 어떻게 성품을 보고 성령을 받아 거룩한 님을 한결 같이 모실 수 있겠습니까 !

여덟째 지금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겠다는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정들고 때묻은 그릇을 몽땅 부셔버리고 이글거리는 불가마에서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디자인으로 새 그릇을 구워야 합니다. 텅 빈 허공을 닮아 욕심 없는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 저것을 저울질하고 대소 경중 장단을 가늠하는 취사심(取捨心)인 차별심을 버려야 새로운 안목이 열립니다. 무아(無我)에서 대아(大我)로 대아에서 진아(眞我)로 나 안에 있는 나를 찾아 성품을 보고 성령을 받겠다는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을 때 계영배의 걸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내 것만 내 집만 나의 종교만 소중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 모두가 한 뿌리고 한 가족이라는 평등의식이 수반되어야 마음이 열립니다. 불생불멸의 영생을 깨닫고 사랑이 아니면 진리가 아니다고 사자후를 토하고 난 뒤에야 일상의 사소한 일도 정작 소중하고 큰 일임을 헤아리게 됩니다. 전부가 하나고 하나가 전부라는 생각에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분수를 지켜 삶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갈 줄 알아야 정성된 기도에 매달 릴 수 있습니다. 열려 있는 기쁜 마음이라야 욕심 없는 허공을 닮아 지혜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내 마음 안에서 일어 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일어납니다. 한 무리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로 자유와 평등과 평화가 어우러진 진리의 길인 사랑의 늪에 빠져 참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홉째 만사에 긍정적인 사고와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생각으로 나도 일생 일대사(一大事)에 매달려 반드시 님을 뵙겠다는 불퇴전심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찬란한 태양이 교회당의 십자가 위에도 대적광전(大寂光殿)의 기왓장 위에도 한치의 차별 없이 생명의 빛을 골고루 비춰주고 있는데 어디에 빈부 귀천의 차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거룩하신 님의 뜻대로 산천과 바다에 뭇 생명을 보내고 거둬들이는 자연의 섭리에 경외감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볼 때 생명의 신비함을 느끼고 긍정적인 사고가 싹이 터서 삶의 윤활유가 됩니다. 동시성(同時性)을 우연이라고만 차치하고 매사에 기(氣)가 죽어 하는 일에 자신감이 없고 신바람이 나지 않으면 기쁨과 정성된 기도를 이끌어 낼 수가 없습니다. 진주조개가 거친 파도에 끊임없이 시달려 양질의 진주를 여물게 하듯이 비록 어렵고 불행한 일이 닥치더라도 유다의 배신처럼 나를 시험하여 보다 성숙한 나를 만들기 위한 시련이라고 여길 때, 그것은 이미 값비싼 교훈이 됩니다. 긍정적인 사고와 자신감은 어렵고 큰 일도 쉽게 해낼 수 있는 힘을 더해주고 궁극의 길인 성품이나 성령을 헤아리게 하는 부지런한 기도에 일심으로 매달리게 해줍니다.

열째 믿어야 님을 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습니다. 전부가 하나고 하나가 전부임을 헤아려 무시무종(無始無終) 원동태허(圓同太虛)한 하나의 님이 내 안에 있음을 믿어야 성품을 보고 성령을 받아 불생불멸이라는 영생의 길을 맛보게 됩니다. 생노병사의 악업을 이승에서 끝내고 대자유(大自由)를 얻어야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 평등 평화가 어우러진 사랑이 진리임을 모르고 또 다른 진리를 찾아 헤맨다면 이것이야말로 짐승의 삶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재산이나 권력이나 지식은 삶을 윤택하고 안락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본래무일물의 영생을 깨닫거나 성품을 보는데는 오히려 크나큰 장애물이 된다고 합니다. 방하착(放下着)으로 무거운 짐일랑 미련 없이 벗어버리시고 만물불이(萬物不二)의 하나를 깨달아 사랑이 진리라는 큰 믿음이 태산같아야 마음이 열린다고 합니다. 마음만 열면 갖가지 금은보화가 내 보물 창고에 가득한데 빌 게이츠를 부러워 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도둑맞을 일도, 주가가 곤두박질칠 조바심도 재산이 거들날 일도 없으니 이보다 더 확실한 부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필요에 따라 합당하게 끄집어내어 쓸 수 있으니 어떤 부자가 열린 마음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가진 마음 창고야말로 자자손손 끝없는 대물림으로 쓰고 써도 모자람 없는 가장 값진 보물 창고입니다. 하늘과 땅에 가득히 서려있는 기를 느끼고 무시무종 하나로 거룩한 님을 믿어야 님을 봅니다.

열 한번째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헤아려야 합니다.
너와 내가 상반된 입장에 사리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병약한 사람을,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을, 젊은 사람은 노인을, 아내는 남편을, 어버이는 자식을, 배운 사람은 못 배운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을, 잘난 사람은 못난 사람을,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을 죄다 거꾸로 헤아릴 줄 알아야 마음의 문을 쉽게 열 수 있습니다. 나뿐이고 남이 없다면 남이야 죽든 살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무엇인들 못 하겠습니까. 만사를 남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면 이 세상은 법이 없고 종교가 없어도 온통 감사와 축복이 넘쳐흐르는 천국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의 기쁨이 극에 달할 때 하늘과 땅에서 뻗쳐오는 현묘한 기(氣)를 느껴 즉금(卽今)의 삶에 감사한 마음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라 스스로 마음이 열리면 자신의 삶을 끝없이 사랑하게 됩니다. 진공묘유의 허공을 경배하는 일에서 진리를 헤아리게 되고, 하나로 거룩한 님을 보게 해줍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이 아닌 진리는 없고 깨달음 없는 행복 또한 없습니다.

열 두번째 지행일체(知行一體)가 되어야 합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를 맹세하고서도 내가 아니면 남이고 남은 원수니 원수를 멸망케 하려고 지하드란 미명아래 전쟁도 불사하는 죄를 무엇으로 설명해야 합니까? 신이 사람을 만들었습니까 사람이 신을 만들었습니까? 이 근본적인 의문도 풀지 못하면서 어떻게 현묘한 님을 바르게 모실 수 있겠습니까. 배워서 알려고 하지 않는 것도 죄이지만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쉽고 가까운 일에서부터 봉사하고 헌신하는데 보람을 찾으면 더 크고 어려운 일도 주저하지 않고 쉽게 해결 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을 여는 방법이 각자의 근기(根氣)와 공부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방편들을 참고하시면 먼 길을 둘러 가는 수고를 조금이라도 아끼지나 않을까 하여 감히 이 글을 엮어 봅니다. 깨달음을 얻는 일은 현묘(玄妙)한 마음공부라서 언설로 표현 할 수 없어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 하라고 일렀습니다. 부디 님께서 본래무일물의 하나를 철견하시고 크나큰 의문 덩어리를 단박에 풀어 성령을 받고 성품을 헤아려 날마다 좋은날을 경영하시길 충심으로 기도 드립니다.

용어 해설
◆ 즉금(卽今) : 즉금(卽今): 지금 여기( Here and Now)를 일겉는 말로 전생이나 내생(來生)을 뭉개버리고 지금 여기서 배고프면 밥 먹고 잠 오면 잠잔다는 일상적인 일이 도(道)요 진리의 본질이란 것을 일깨워 주는데 쓰이는 말로 즉금에 충실한 삶이 행복한 삶이고 즉금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영적인 기도의 바탕이 된다.
◆ 참나 : 진아(眞我)라고도 하는데 물질적인 나와 정신적인 나가 흔적 없이 사라져서 무심의 상태에 들면 껍데기뿐인 거짓나를 아낌없이 벗어버리고 생사를 떠난 영생의 길에 들게 된다고 한다. 무아에서는 자신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가운데 진실로 존재하고, 있는 가운데 없는 현묘한 이치를 깨달아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된 경계에서 대아(大我)를 헤아려 실상무상인 참나를 깨달아 진리 안에서 영원을 살게 된다고 한다.
◆ 이름 : 진리와는 거리가 먼 차별심으로 짓는 유형 무형의 모든 이름. 天地, 日月 ,山水, 晝夜, 大小, 有無, 生死, 장단, 富貴 ,美醜, 하나님, 부처님, 비슈누, 시바, 메시아, 미륵불, 도, 법, 신, 천당, 지옥, 번뇌 망상, 책상, 걸상, 자유의 女身像등으로 이름하는 보통, 추상, 고유명사의 총칭. 그러나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 "도라고 부른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으로 부른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고 하지만 이름 아니고는 무엇으로 현묘한 이치를 드러내 보이랴 ! 이름 때문에 하나가 오만 가지가 되고, 오만 가지가 하나가 됨을 헤아려야 내 안에 있는 참 나를 철견 한다. 이름으로 고정관념의 틀에 매이게되면 번뇌 망상이 구름처럼 일어나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어리석음에서 한 치도 벗어 날 수 없어 확연허명(確然虛名)한 허공을 님으로 모실 수 없다.
◆ 무위자연(無爲自然) : 중국 철학의 도가(道家)에서 제창(提唱)한 인간의 이상적인 행위로 자연법칙에따라 행위하고 자연에 반하는 일체의 인위적인 행위를 배제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하지 않는 일이 없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리를 헤아리면 이 세상에서 어느 것 하나 애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이 걸림 없고 막힘 없는 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 진공묘유(眞空妙有) : 님의 실체는 진실로 텅비어 그 형상을 어림 할 수 없는 일이다. 참으로 텅 비어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묘하게 존재한다는 뜻. 불성이나 성령을 나타내는 거룩한 님은 진실로 아득한 일이라서 우리들의 안목으로는 볼 수도 헤아릴 수도 없지만 마음이 열린 사람은 없는데서 있음을 보고 있는데서 없음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려 진공묘유인 허공의 현묘한 이치를 헤아릴 수 있다.
◆ 님 :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원동태허(圓同太虛)하게 자재하는 성품이나 성령을 님으로 불렀다. 하나님이나 부처님으로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중도(中道)의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나타내는 님이다. 이 님은 허공과 같아서 우리 육안(肉眼)으로는 볼 수도 느낄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안목(眼目)이 열린 사람에게는 하나가 전부고 전부가 하나라는 이치를 꿰뚫어 하나 안에 전부를 갖추고 있는 님인 자성(自性)을 언제 어느 곳에서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일이지만 언설(言說)로는 이 이치에 이를 수 없는 일이라서 언어도단(言語道斷)이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한다.
◆ 무시무종(無始無終) :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뜻. 도(道)가 시작된 일도 끝 나는 일도 없이 영원히 생겨나고 없어지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유무상생의 무위자연을 영위해 나간다.
◆ 원동태허(圓同太虛) : 우주 질서를 다스리는 하나로 거룩한 님의 모습은 하늘 처럼 둥글고 가 없고 텅비어 감히 우리 인간의 안목(眼目)으로는 그 본 모습을 헤아릴 수 없는 자성(自性)이라서 님은 무시무종으로 원동태허 하다고 표현 한다. 무시무종으로 원동태허한 님의 모습을 붙잡을 수 있는 날 성품을 헤아려 영생을 얻는다고 한다.
◆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 스펜서의 제일 원리인 원점(原點 = Primary Point)으로 우주 탄생의 단초(單初)인 본래자리나 마음자리를 일컫는 말로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님이다. 우리들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고 혜안(慧眼)이나 불안(佛眼)으로만 볼 수 있는 님으로 허공, 무심, 일심, 본래자리, 마음자리, 진여, 여여, 성품, 자성, 성령으로 불리기도 한다. 늘 하나로 거룩하게 계신 하나님이시고 부처님이신 일물은 원동태허(圓同太虛)하고 무흠무여 (無欠無餘)한 자성이라서 이를 있다고 해도 그르고 없다고 해도 이치에 합당하지 않아 육조(六祖) 혜능선사가 이를 본래무일물인 일물로 드러내 보인데서 유래된 용어.
◆ 만물불이(萬物不二) : 이 세상에 드러난 모든 물건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뜻. 만물은 지수화풍의 사대가 인연을 만나 생겨 났다가 다시 본래자리인 원점으로 되돌아 가서 님의 품에 하나로 온전하게 안기게 되니 수천 수만 가지가 둘일 수 없다는 생각이다. 차별심(差別心)을 버려 무심에 들면 하나가 전부요 전부가 하나라는 진리에 사무쳐서 님의 품에서 영원을 살아 가는데 어디서 유무 생사가 둘이라는 두 살림을 차릴 수 있으랴! 만물불이를 헤아릴 수만 있으면 성불 못하고 영생 얻지 못할 사람 없다고 한다.
◆ 중도(中道) : 차별심에서 일어나는 대립적인 관념인 생사 유무 대소등의 양변을 철저히 타파하여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 진공묘유의 진리를 받아 들이는 깨달음의 정수. 중도를 깨달아 진공묘유의 현묘한 이치를 헤아리게 되면 불생불멸의 영생의 길에 들 수 있지만 이 일은 마음이 짓는 일이라서 어려워서 쉽고 쉬워서 어렵다고 한다.
◆ 실상무상(實相無相) : 불교철학의 종지(宗旨)는 실상무상으로 진리인 사랑의 참 모습은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소리나 빛깔도 없고 그 없다는 생각도 없다는 이치를 궁구 해야한다. 그러나 없으면서 있는 이 하나가 스펜서의 원점이요 마음자리요 본래자리요 무심으로 지혜명상을 증득한 혜안(慧眼)에만 나타나는 진여의 실상이다. 이는 중도관(中道觀)에서 헤아릴 수 있는 용어로 실상무상(實相無相)을 종(宗)으로 삼고 지극정성으로 모시면 끝내는 불생불멸의 영생의 길에 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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