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제자가 가져야할 마음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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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일발 작성일12-03-13 07:37 조회5,202회 댓글0건본문
부처님 제자가 가져야할 마음가짐
1. 진리는 스스로 깨우침으로서 발견할 수 있다.
"오직 여래만이 그 길을 가르치니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라!"
부처님께서 구원자라 불려지시는 것은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고 보여 주었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그 길은 스스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은 헌신적인 善行에 대한 보답으로 신이나 다른 힘이 내리는 자비로운 은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리를 깨우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2. '믿음'이 아니라 바르게 '보아야'한다.
"세존이시여, 어떤 수행자와 브라만이 이 곳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교의만을 설명하고 가르칠 뿐, 다른 어떤 교리에 대해서도 경멸하고 비난하고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때 다른 수행자와 브라만이 왔는데, 그들 역시 앞서의 수행자와 브라만과 똑같이 자기 교의만을 내세우고, 다른 교리를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저희로서는 그들 존경스러운 수행자가와 브라만 중에 누가 진리를 설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칼라마들이여! 너희들의 의심과 혼란은 당연한 것이니라. 의심이란 의심스러운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제 칼라마들이여! 조심하라. 풍문이나 소문이나 전래되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 聖典의 권위든 단순한 논리나 추론이든 그에 끌려다니지 말라. 그럴 듯한 겉모습이나 공허한 논리의 기쁨에도 현혹되지 말라. 또한 표면적인 가능성이나 관념에도 현혹되지 말라. 이거이 나의 가르침이니라. 그러나 칼라마들이여, 어떤 것이 건전하지 못하고 잘못되고 악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그것들을 버리도록 하라. 어떤 것이 건전하고 선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는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따르도록 하라."
부처님은 특정 종교에서 주장하는 진리에 대한 정당성을 자신의 냉철한 이성과 경험에 비추어 검증해 볼 것을 가르쳤다. 이러한 불교의 이성적 태도는 철저히 과학적이라 할 수 있으며 맹목적 신앙이나 독단론에 대한 비판 정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맹목적 신앙이나 독단적인 주장이나 주의(-ism)는 '믿음'을 줄 수는 있지만 '의문'을 풀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3. 너와 나의 종교는 모두 중요하다.
나란다에 마하비라(자이나교의 창시자)의 제자중에서 특히 뛰어난 재가 신도였던 우바리라고 하는 장자가 있었다. 마하비라는 그를 특별히 부처님께 보내 業에 관한 논쟁을 펼쳐 부처님을 누르기를 바랬다. 그러나 기대와는 반대로 우바리는 부처님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부처님께 재가 신도로 받아들여줄 것을 간청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신중히 고려하라고 말씀하시고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한다. 다시 우바리가 청하였지만 끝내 부처님께서는 모시던 옛 스승을 계속 모실 것을 권유한다.
부처님께서는 타종교에 대한 관용과 평화를 가르치셨다. 부처님을 모든 다툼에서 떠난 이(ranamjaha)라고 부른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범망경(梵網經)》(남전대장경 6, 52-53)에는 당시 인도사상계의 62종의 견해에 대하여,
여래는 이미 이러한 여러 견해들의 장단점과 그 결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보다도 더 휼륭한 것도 알고 있지만 지식에 집착함이 없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적멸(寂滅)과 해탈을 얻었다.
고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제자가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면 그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며, 타종교와 다투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타종교인에 대한 배타적 감정이나 분노, 시기, 질투, 증오 등의 감정은 이기주의적 탐욕이나 진리에 대한 잘못된 견해인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미움은 노여움이 아닌 사랑으로, 악은 선으로 정복하라고 설했으며, 적대주의와 미움을 가르치는 자에게는 미움은 미움에 의해 사라지지 않는다. 오직 사랑만이 미움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4. 누구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한때 옹기장이의 움막에서 밤을 보내셨다. 그 움막에는 먼저 도착한 한 젊은이가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부처님께서는 '이 젊은이는 가는 길이 즐거워 보이는 구나! 그와 예기를 나누어도 좋을 것 같다.'라고 생각하시고는 그에게 스승은 누구이며 왜 수행자의 길을 가는지를 물었다. 그 젊은이는 이미 아라한이 되어 널리 가르침을 펴고 있다는 고타마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길을 나서는 것이라 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 때문에 수행자가 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가르침을 예기한다. 푸꾸사티라는 이 젊은 수행자는 비로소 가르침을 다 듣고 나서야 부처님을 알아보게 된고, 아라한이 된다.
그리고 부처님께 벗이라 불렀던 점을 사과하는 예기가 中阿含에 나온다.
수행자 푸꾸사티는 가르침을 듣는 동안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하지만 약이 좋으면 어떤 종류의 약인지 몰라도 치료되는 것처럼, 누가 약을 준비했는지 그 약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5. '관념'에 얽매이는 것은 잘 못된 것이다.
-심지어는 '法'에 이르기까지도.
①비구여! 더러움과 번뇌는 보고 아는 자만이 부술 수 있다. 보지도 않고 만지지도 못하는 자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②존경하는 고타마여, 우리에게는 옛부터 파괴되지 않고 계속 구전으로 내려오는 성전이 있습니다. 그 성전에 대하여 브라만 들은 "이것만이 진리이고, 그 외의 것은 모두 거 짓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존경하는 코타마여,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처님께서는,
그러면 브라만들 중 단 한명이라도 "이것만이 진리이고 그 외의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는 것을 개인적으로 보고 알았다고 하는 자가 있는가?
그 젊은 브라만은 솔직하게 없다고 했다.
그러면 7세대나 더 거슬러 올라간 브라만의 스승이나, 그 의 스승, 혹은 그 성전의 원저자 가운데 "이것만이 진리이고 그 외의 모든 것은 거짓이다."라는 것을 보고 알았다고 주장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앞사람에 묶여 있는 장님들의 줄서기와 같다. 첫 번째 사람이 보지 못하고, 중간 사람도 보지 못하며, 마지막 사람도 보지 못한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브라만들은 장님들의 줄서기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브라만의 무리들에게 중요한 충고를 한다.
진리를 수호해야 할 현명한 사람이 "이것만이 진리이고 그 이외의 모든 것은 거짓이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진리 수호의 뜻을 설명해 달라는 젊은 브라만의 요청을 받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인간은 각자의 믿음을 갖고 있다. 만약 "이것이 나의 믿음이요."라고 한다면 진리는 그 한도 내에서 인정된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이것만이 진리이고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는 절대적 결론에 도달할 수 는 없다.
그러나 그의 신앙이나 믿음을 이유로 그가 믿는 것만이 절대적 진리이고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의 사물이나 관점에 집착하여 다른 사물이나 관점에 열등하다고 멸시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을 얽어매는 사슬과 같다.
③비구들이여! 아무리 올바르고 명확한 관점이라도 그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가르침이란 강을 건너면 버려야 하는 뗏목 같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와 같이 내가 가르쳐 온 法은 뗏목과 같으니라. 뗏목은 강을 건너는 데 필요한 것이지, 들고 다닐 것은 못되느니라. 비구들이여! 가르침이 뗏목과 같음을 이해한다면 法조차 버려야 하느니라. 하물며 그것이 非法이라면 더욱더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부처님께서는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설법은 하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실천적 스승이었으며, 인간을 행복과 평화로 인도하는 설법을 하셨다.
6. 필요 없는 '질문'들은 빨리 버려야 한다.
①우주는 영원한가?
②우주는 영원하지 않은가?
③우주는 끝이 있는가?
④우주는 끝이 없는가?
⑤영혼은 육체와 같은가?
⑥영혼은 육체와 서로 다른가?
⑦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하는가?
⑧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하지 않는가?
⑨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가?
⑩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마릉가가 부처님께 위와 같이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런 것이 못마땅합니다. 이러한 문제의 해답을 가르쳐 주셔야만 성스러운 삶을 따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승단을 떠나겠습니다. 우주가 영원한지 영원하지 않은지를 모르신다면 그런 문제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솔직히 "나는 모른다. 나는 보지 못했다."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마릉가여, 내가 너에게 "마릉가여 내게 와서 거룩한 삶을 영위하라."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너도 나에게 "세존이시여, 당신 밑에서 성스러운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러면 내게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마릉가여, 나는 지금까지 너에게 "내 밑에 와서 성스러운 삶을 살라. 내 너에게 그 의문에 대해 설명해 줄 것이니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리고 너 역시 나에게 "세존이시여, 당신 밑에서 성스러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내게 의문에 대해 대답해 주십시오."라고 말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이 어리석은 자여! 누가 누구를 거부하겠느냐? 마릉가여, 어떤 사람이 "나는 세존이 의문에 대해서 설명하여야 그 밑에서 성스러운 삶을 살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여래에게서 대답을 듣지 못할뿐더러 그 문제와 씨름하다가 죽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마릉가여, 나는 설명할 것을 했고, 설명하지 않을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해라. 내가 설명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우주가 영원하지 않은지에 대해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마릉가여, 내가 왜 설명하지 않았는가? 그러한 설명은 이롭지 않고, 정신의 성스러운 삶과 근본적으로 관계가 없으며, 厭汚離欲止滅寂靜三昧大覺涅槃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내가 그런 의문에 대해 설명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면 마릉가여! 내가 무엇을 설명했는가? 나는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명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로우며, 성스러움 삶과 관련이 있고, 厭汚離欲止滅寂靜三昧大覺涅槃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내가 그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성스러운 삶에 이르는 길에 形而上學的인 문제들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든 나고 늙음, 병들고 죽음, 슬픔과 한탄, 고뇌, 고통, 근심이 있기 마련이다. 진정으로 탐구해야 하는 것, 듣고, 배워서, 체득해야 할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1. 진리는 스스로 깨우침으로서 발견할 수 있다.
"오직 여래만이 그 길을 가르치니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라!"
부처님께서 구원자라 불려지시는 것은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고 보여 주었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그 길은 스스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은 헌신적인 善行에 대한 보답으로 신이나 다른 힘이 내리는 자비로운 은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리를 깨우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2. '믿음'이 아니라 바르게 '보아야'한다.
"세존이시여, 어떤 수행자와 브라만이 이 곳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교의만을 설명하고 가르칠 뿐, 다른 어떤 교리에 대해서도 경멸하고 비난하고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때 다른 수행자와 브라만이 왔는데, 그들 역시 앞서의 수행자와 브라만과 똑같이 자기 교의만을 내세우고, 다른 교리를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저희로서는 그들 존경스러운 수행자가와 브라만 중에 누가 진리를 설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칼라마들이여! 너희들의 의심과 혼란은 당연한 것이니라. 의심이란 의심스러운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제 칼라마들이여! 조심하라. 풍문이나 소문이나 전래되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 聖典의 권위든 단순한 논리나 추론이든 그에 끌려다니지 말라. 그럴 듯한 겉모습이나 공허한 논리의 기쁨에도 현혹되지 말라. 또한 표면적인 가능성이나 관념에도 현혹되지 말라. 이거이 나의 가르침이니라. 그러나 칼라마들이여, 어떤 것이 건전하지 못하고 잘못되고 악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그것들을 버리도록 하라. 어떤 것이 건전하고 선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는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따르도록 하라."
부처님은 특정 종교에서 주장하는 진리에 대한 정당성을 자신의 냉철한 이성과 경험에 비추어 검증해 볼 것을 가르쳤다. 이러한 불교의 이성적 태도는 철저히 과학적이라 할 수 있으며 맹목적 신앙이나 독단론에 대한 비판 정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맹목적 신앙이나 독단적인 주장이나 주의(-ism)는 '믿음'을 줄 수는 있지만 '의문'을 풀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3. 너와 나의 종교는 모두 중요하다.
나란다에 마하비라(자이나교의 창시자)의 제자중에서 특히 뛰어난 재가 신도였던 우바리라고 하는 장자가 있었다. 마하비라는 그를 특별히 부처님께 보내 業에 관한 논쟁을 펼쳐 부처님을 누르기를 바랬다. 그러나 기대와는 반대로 우바리는 부처님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부처님께 재가 신도로 받아들여줄 것을 간청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신중히 고려하라고 말씀하시고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한다. 다시 우바리가 청하였지만 끝내 부처님께서는 모시던 옛 스승을 계속 모실 것을 권유한다.
부처님께서는 타종교에 대한 관용과 평화를 가르치셨다. 부처님을 모든 다툼에서 떠난 이(ranamjaha)라고 부른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범망경(梵網經)》(남전대장경 6, 52-53)에는 당시 인도사상계의 62종의 견해에 대하여,
여래는 이미 이러한 여러 견해들의 장단점과 그 결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보다도 더 휼륭한 것도 알고 있지만 지식에 집착함이 없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적멸(寂滅)과 해탈을 얻었다.
고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제자가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면 그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며, 타종교와 다투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타종교인에 대한 배타적 감정이나 분노, 시기, 질투, 증오 등의 감정은 이기주의적 탐욕이나 진리에 대한 잘못된 견해인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미움은 노여움이 아닌 사랑으로, 악은 선으로 정복하라고 설했으며, 적대주의와 미움을 가르치는 자에게는 미움은 미움에 의해 사라지지 않는다. 오직 사랑만이 미움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4. 누구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한때 옹기장이의 움막에서 밤을 보내셨다. 그 움막에는 먼저 도착한 한 젊은이가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부처님께서는 '이 젊은이는 가는 길이 즐거워 보이는 구나! 그와 예기를 나누어도 좋을 것 같다.'라고 생각하시고는 그에게 스승은 누구이며 왜 수행자의 길을 가는지를 물었다. 그 젊은이는 이미 아라한이 되어 널리 가르침을 펴고 있다는 고타마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길을 나서는 것이라 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 때문에 수행자가 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가르침을 예기한다. 푸꾸사티라는 이 젊은 수행자는 비로소 가르침을 다 듣고 나서야 부처님을 알아보게 된고, 아라한이 된다.
그리고 부처님께 벗이라 불렀던 점을 사과하는 예기가 中阿含에 나온다.
수행자 푸꾸사티는 가르침을 듣는 동안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하지만 약이 좋으면 어떤 종류의 약인지 몰라도 치료되는 것처럼, 누가 약을 준비했는지 그 약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5. '관념'에 얽매이는 것은 잘 못된 것이다.
-심지어는 '法'에 이르기까지도.
①비구여! 더러움과 번뇌는 보고 아는 자만이 부술 수 있다. 보지도 않고 만지지도 못하는 자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②존경하는 고타마여, 우리에게는 옛부터 파괴되지 않고 계속 구전으로 내려오는 성전이 있습니다. 그 성전에 대하여 브라만 들은 "이것만이 진리이고, 그 외의 것은 모두 거 짓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존경하는 코타마여,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처님께서는,
그러면 브라만들 중 단 한명이라도 "이것만이 진리이고 그 외의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는 것을 개인적으로 보고 알았다고 하는 자가 있는가?
그 젊은 브라만은 솔직하게 없다고 했다.
그러면 7세대나 더 거슬러 올라간 브라만의 스승이나, 그 의 스승, 혹은 그 성전의 원저자 가운데 "이것만이 진리이고 그 외의 모든 것은 거짓이다."라는 것을 보고 알았다고 주장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앞사람에 묶여 있는 장님들의 줄서기와 같다. 첫 번째 사람이 보지 못하고, 중간 사람도 보지 못하며, 마지막 사람도 보지 못한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브라만들은 장님들의 줄서기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브라만의 무리들에게 중요한 충고를 한다.
진리를 수호해야 할 현명한 사람이 "이것만이 진리이고 그 이외의 모든 것은 거짓이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진리 수호의 뜻을 설명해 달라는 젊은 브라만의 요청을 받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인간은 각자의 믿음을 갖고 있다. 만약 "이것이 나의 믿음이요."라고 한다면 진리는 그 한도 내에서 인정된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이것만이 진리이고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는 절대적 결론에 도달할 수 는 없다.
그러나 그의 신앙이나 믿음을 이유로 그가 믿는 것만이 절대적 진리이고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의 사물이나 관점에 집착하여 다른 사물이나 관점에 열등하다고 멸시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을 얽어매는 사슬과 같다.
③비구들이여! 아무리 올바르고 명확한 관점이라도 그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가르침이란 강을 건너면 버려야 하는 뗏목 같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와 같이 내가 가르쳐 온 法은 뗏목과 같으니라. 뗏목은 강을 건너는 데 필요한 것이지, 들고 다닐 것은 못되느니라. 비구들이여! 가르침이 뗏목과 같음을 이해한다면 法조차 버려야 하느니라. 하물며 그것이 非法이라면 더욱더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부처님께서는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설법은 하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실천적 스승이었으며, 인간을 행복과 평화로 인도하는 설법을 하셨다.
6. 필요 없는 '질문'들은 빨리 버려야 한다.
①우주는 영원한가?
②우주는 영원하지 않은가?
③우주는 끝이 있는가?
④우주는 끝이 없는가?
⑤영혼은 육체와 같은가?
⑥영혼은 육체와 서로 다른가?
⑦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하는가?
⑧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하지 않는가?
⑨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가?
⑩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마릉가가 부처님께 위와 같이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런 것이 못마땅합니다. 이러한 문제의 해답을 가르쳐 주셔야만 성스러운 삶을 따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승단을 떠나겠습니다. 우주가 영원한지 영원하지 않은지를 모르신다면 그런 문제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솔직히 "나는 모른다. 나는 보지 못했다."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마릉가여, 내가 너에게 "마릉가여 내게 와서 거룩한 삶을 영위하라."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너도 나에게 "세존이시여, 당신 밑에서 성스러운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러면 내게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마릉가여, 나는 지금까지 너에게 "내 밑에 와서 성스러운 삶을 살라. 내 너에게 그 의문에 대해 설명해 줄 것이니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리고 너 역시 나에게 "세존이시여, 당신 밑에서 성스러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내게 의문에 대해 대답해 주십시오."라고 말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이 어리석은 자여! 누가 누구를 거부하겠느냐? 마릉가여, 어떤 사람이 "나는 세존이 의문에 대해서 설명하여야 그 밑에서 성스러운 삶을 살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여래에게서 대답을 듣지 못할뿐더러 그 문제와 씨름하다가 죽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마릉가여, 나는 설명할 것을 했고, 설명하지 않을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해라. 내가 설명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우주가 영원하지 않은지에 대해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마릉가여, 내가 왜 설명하지 않았는가? 그러한 설명은 이롭지 않고, 정신의 성스러운 삶과 근본적으로 관계가 없으며, 厭汚離欲止滅寂靜三昧大覺涅槃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내가 그런 의문에 대해 설명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면 마릉가여! 내가 무엇을 설명했는가? 나는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명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로우며, 성스러움 삶과 관련이 있고, 厭汚離欲止滅寂靜三昧大覺涅槃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내가 그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성스러운 삶에 이르는 길에 形而上學的인 문제들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든 나고 늙음, 병들고 죽음, 슬픔과 한탄, 고뇌, 고통, 근심이 있기 마련이다. 진정으로 탐구해야 하는 것, 듣고, 배워서, 체득해야 할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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